“성군(聖君)? 성군(性君)?”, 두 얼굴의 왕 성종(成宗)

[역사 속 건강] “성군(聖君)? 성군(性君)?”, 두 얼굴의 왕 성종(成宗)

 

두 얼굴의 왕, 성종

조선시대 성군은 누구?

조선 임금의 실루엣

조선 9대 왕 성종

낮에는 공부합니다.

밤에는 놉니다.

19세 미만 금지 표시

경복궁과 성종의 처첩

정력이 넘치는 사람

놀라는 모습의 이미지

동의보감과 서증

조선의 궁내 직원 모습

더운 여름날의 모습과 서증

신장(콩팥)과 정력의 관계

I am your Father

정력과 정기의 중요성

 

“조선시대 성군은 누구?”

학교 다닐 때 들었던 역사 수업을 돌이켜 봅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세종일 것이고, 그 뒤로 정종, 성종 정도가 떠오를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저들은 조선 왕조 27명의 왕들 가운데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위대한 업적을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훈민정음=세종대왕’, ‘경국대전=성종’, ‘규장각=정조’ 기억나시죠?

각종 미디어 매체 등을 통해 우리에게 친숙한 세종과 정조는 조선의 전후반기 르네상스를 열고 책임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아울러 성종 역시 경국대전 완성을 통한 조선의 헌법제도 배포, 3사제도 확립을 통한 비판정치 활성화, 김종직 등 사림 등용을 통한 신진유림세력 육성 등, 조선의 500년 왕조 기틀을 바로 세웠다는 평가를 받는 군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성종의 전후대 임금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성종의 전대 임금은 성종의 작은 아버지인 8대 예종입니다. 물론 예종은 1년밖에 왕위에 있지 못하고 급사하여, 사실상 성종의 전대 임금은 “누가 왕이 될 상인가!”를 외쳤던 성종의 할아버지 세조입니다.

그렇다면 성종의 아래는 누구일까요. 아실 분들은 아시겠지만, 성조의 아들이자 제 10대 조선의 군주는 바로 조선 500년 역사상 최악의 폭군으로 꼽히는 연산군이었습니다. 이 연산군은 하라는 정치는 안하고 주색잡기(酒色)에 빠져지냈으며, 특히 여색을 밝혀 1만 궁녀의 꿈을 위해 달리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성군(成君) 성종에게 저런 호부견자(虎父犬子)가 탄생했던 것일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분명 하나는 확실하게 물려받긴 했습니다. 성종 역시 당대의 성군(性君)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라는 공부도 잘하고…

원래 성종 이혈은 왕이 될 포지션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성종의 아버지는 세조의 적장자 의경세자였으나, 19살에 급사, 왕위가 세조의 차남 해양대군에게 넘어가 예종이 즉위한 것이죠. 그런데 될 놈은 되는 것인지, 예종이 1년 만에 급사하고 예종의 아들이 너무 어린 관계로 다시 기회가 돌아오게 됩니다.

예종은 누구인가?!

그런데 여기서도 성종은 불리했습니다. 자신의 형님이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의 총명함을 형인 월산대군보다 높게 산, 신하들의 추대(물론 정치적인 입장도 반영되었습니다. 한명회라든지, 한명회라든지, 한명회라든지…)로 13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비록 어린나이에 왕이 된 성종이지만, 나이에 걸맞지 않은 총명함과 재능으로 실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성종은 조선의 법률, 언론, 인사제도는 물론 외교, 학문, 군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치적을 쌓았습니다. 또, 조선의 스피릿(Spirit)인 유교사상을 공고히 한 왕이기도 하며, 유학경전을 매일 공부하는 왕이었습니다. 덕분에 관료들은 물론 전국민 유교정신 확립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해야만 했습니다.

실제 경국대전에는 조선의 악법이라 할 수 있는 과부재가금지법이 포함돼 있는데, 말 그대로 여성의 재혼을 법으로 금한 것입니다. 당시 신료들은 유교적 가치관에 얽매여 있는 분위기는 아니어서 재가금지법은 대부분 반대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종은 유교적 가치관이라며 이를 관철시켰습니다. 다시 말해 여성의 정조를 강조한 셈인데, 실제 조선의 대표적 팜므파탈로 꼽히는 어을우동에게 사형을 내린 사람이 바로 성종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남자, 정작 성종 본인은 옴므파탈이었습니다.

 

낮에는 요순(堯舜), 밤에는 걸주(桀紂)

성종은 세종과 세조가 기틀을 다져놓은 치적을 계승해 그것을 꽃피운 조선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꾸린 왕입니다. 도학(道學)의 나라로 조선을 이끌며 바른 생활하는 신하와 백성을 꿈꾸는 전설 속 요순 임금과도 같은 마인드를 가졌던 군주였죠.

그런데 성종이 그 못지 않게 좋아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여자입니다. 조선을 유학의 나라로 만들기를 꿈꿨던 성종이지만, 그 자신은 여자를 참으로 좋아했습니다. 실제 성종은 조선의 왕 중 태종과 더불어 가장 많은 부인을 둔 왕이었습니다. 총 12명의 부인을 뒀는데, 중전 공혜왕후 한씨, 제2계비 전현왕후 윤씨, 명빈 김씨, 귀인 정씨, 귀인 엄씨, 귀인 권씨, 숙의 홍씨, 숙의 하씨, 숙의 김씨, 숙용 심씨, 숙용 권씨, 그리고 제1계비이며 폐비인 제헌왕후 윤씨가 바로 그들입니다.

성종의 현란한 가족관계도

성종은 이들 12명의 부인에게서 무려 16남 12녀를 봤는데, 성종이 승하한 나이가 38살임을 감안하면, 그리고 비빈에 들지 못했지만 성종과 하룻밤을 보냈을 많은 궁녀들을 생각해보면, 그의 밤이야기는 실로 흥미진진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12명의 부인과 28명의 자녀, 성종은 정력왕?!

낮에는 올바른 정치를 위해 매진하고, 밤에는 술과 여성을 위해 매진했던 성종. 이렇게 보면 성종은 모든 것을 다 가졌던 남자 같습니다. 능력과 권력과… 정력까지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성종은 정말로 건강했을까요? 사실 성종은 그다지 건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성종이 승하한 나이는 38세로, 당시 평균수명을 감안하더라도 한창의 나이었습니다. 당시 성종의 사인(死因)은 적취(積聚, 체증이 오래되어 배 속에 덩어리가 생기는 병)였던 것으로 실록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체증은 기혈의 순환이 조화롭지 못해 체내 기관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발생하게 되는 병입니다. 실제 성종은 만성질환 몇 개를 달고 살았는데요, 그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서증(暑症)입니다.

일사병? 열사병? 서증?

서증(暑症). 흔히 더위 먹었다고 말하는 병이 바로 이 서증인데, 성종은 어린 시절부터 이 여름만 되면 서증으로 고생했으며, 이를 평생 달고 살았습니다. 게다가 그 증상 발현 정도가 심해 여름에는 편전에서 업무처리를 하는 정사 전체를 중지했을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서증은 열병으로 볼 수 있으며, 결국 체내 화기(火氣)로 인해 유발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음양의 조화가 깨지면 가장 악영향을 받는 기관이 바로 신장(腎臟, 콩팥)입니다.

신장은 간과 더불어 우리 몸의 해독기관으로 역할을 하는 곳으로 이곳에 이상이 발생할 경우 건강에 치명적인 문제를 유발하게 됩니다. 생각해보세요. 체내 독소가 배출되거나 해독되지 못하고 몸에 쌓이기만 하는 상황을. 서증으로 인해 콩팥의 기능이 나빠진 것일 수도 있고, 콩팥의 기능이 좋지 못해 서증에 쉽게 노출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결론은 성종의 건강이 좋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건강과 바꾼 쾌락, “짧고 굵게 살리라”

서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음식이나 생활습관 등에서 조심하고 가려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서증 환자에게 금기시 되는 것이 바로 과도한 성생활입니다. 한의학에서 정기(精氣) 혹은 정력(精力)은 우리 몸을 이루는 매우 중요한 근간으로 보고 있으며, 따라서 이런 정기의 낭비를 되도록 멀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종은 그렇지 않고 정기를 아낌없이 방사한 셈입니다. 특히나 이 정기를 관장하는 기관이 신장인데, 성종은 서증으로 인해 이미 신장이 좋지 못했음에도 신장의 기운이 쇠하도록 주색(酒色)을 즐겼습니다. 그렇게 아낌 없이 정력을 내보낸 성종은 불혹을 채우지도 못하고 그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실로 건강과 바꾼 쾌락이었던 것인데요.

문(文)과 성(性), 양쪽 모두 뛰어난 군주였던 성종. 그런 그가 조금만 자신의 정기를 아꼈다면, 그래서 더 오래 살며 치세를 펼치고, 자식교육을 더 신경 썼다면, ‘우리 연산군이 달라졌어요’를 기대했어봤어도 되지 않았을까라는 의미 없는 생각을 해보면서, 사람에게 있어 정기, 정력이 얼마나 중요한 지 되새기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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